월간잡지 C3 Korea 05-02월호에 ‘건축가 정영한’이 소개되었습니다.
첫 만남부터 자신감에 넘친다.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이며, 앞으로의 계획, 건축에 대한 생각도 막힘이 없다. 모형이나 도면, 텍스트 등의 자료들을 보내주는 것부터 인터뷰 약속, 사진촬영 일정까지 일일이 다 체크하고 확인한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웬만한 열정과 애착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로 서른 여섯의 젊은 건축가는 건축에 중독되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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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선영 기자
1. “컨테이너”로서 시작하기 ( beginning of the container )
유희를 위한 즉흥 ( improvisation for pleasure )
의식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에 진저리를 느낀다.무언가로부터 이제는 너무나 지배적이 되 버린 사유의 한계를 조금씩 버려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그 버림으로 인해 생겨 지는 것으로부터 지배적이지 않은 이면의 것들을 들추어 내보기를 원한다.건축이 가져왔던 오랜 습성과 인식들을 그저 우린 답습하며 그 틀 속에서 벗어 나기 위해 또 다른 경계들을 인위적으로 세우고 그 경계들 속에서 그저 주체인 듯, 관찰자로서의 역할만을 오랜 동안 수행해 오는 역할 밖엔 없었다.이젠 더 이상의 일련의 전통적 건축 행위로부터 한 발짝 물러 나고 싶다.이는 나의 짧은 건축 생활 속에서의 혹독한 듯 단편적인 건축의 현실과 소위 사회에서 원하는 절대적 명제와 같은 건축 속에서 어떠한 관계를 지어 보려는 어설픈 몸짓에 지나지 않겠지만,순수를 향한 열정 속에 조심스레 비 순수성의 제거 작업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조금씩 눈을 감아 본다.
에쿠우스……고귀한 에쿠우스
성실하고 참된……신의 종……그대 신은 이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나에게 있어 건축은 중독( archiholic )과도 같다. 중독자로의 삶, 어떤 대상과 관계 이상의 집착을 통해 삶을 일부 시 하는 것,그 것은 어떤 대상(인간)에 의한 상실감으로부터 출발하여 유형(건축)에 대한 집착에 이르기 까지, 그 집착으로부터의 상실로 인한 공허를 치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유희가 있어서 그 상투적인 단어( archiholic )를 대체할 만한 것이 없을지 모를 일이다.모든 건축을 행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사뭇 다를 리 없겠지만, 내가 건축에 대한 태도를 다르게 가져 갈 수 있었던 계기와 나름의 작은 사건들, 기억의 단편, 실제와 무관한 상상들, 열정, 현실에 주어진 경계, 그 것들의 내면에 배여 있는 자극( scene )으로부터 나는 끊임없이 즉흥(improvisation)을 통해 변주를 하는 것이다.그 변주는 keith Jarrett의 이례적인 클래식에 근접한 해석 (< Still Life >에서 보여준 무소르그스키의 응용, < 24 Preludes & Fugues, op.87 >에서의 쇼스타코비치, 쇤베르크로 확립된 무조성 12음악 기법의 영향을 보이던 ECM 레이블 초기 시절 ) 과 자유로운 즉흥성의 발현, 풍부한 상상력에 의한 논리적인 전개로 고도의 완성도 높은 화성개념에서 보이는 것이나,또는 Enrico pieranunzi의 연주에서 보여지는 enrio morricone에 대한 서정성의 미학적 재해석을 통해 감성에 기반을 둔 연주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들에게 있어 대가bill evans의 영감( inspiration )을 통해 새롭게 발현되고 있는 일종의tribute적 연주와는 달리, 나의 변주는, 영감의 근원이자 자극의 원초적인 힘을 줄 수 있는 대가의 부재로 인해 오히려 자유로운 즉흥적 행위가 건축의 본질에 대한 사유의 무거움을 덜어 준다. 그 사유란 건축물의 물(物)이 아닌 다른 대상(對象), 특이성의 생산으로서 나에게 관계 하고 있는 것, 또는 건축 행위의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개인적 감성을 현실 세계에 구축하려는 욕망 표출의 한 태일 것이다.건축의 본질을 은유적 비유를 통해 진부한( cliché )언어로 설명하거나 지금 하고 있는 나의 행위가 어떠한 범주나 이즘에 속할지라도 지금 당장은 그것들로부터 거리를 두어 행위만을 봐주길 바랄 뿐이다. 아직은 명확하지 않은 건축언어와 다듬어 지지 않은 행위의 이면에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치기 어린 감성으로만도 벅차기 때문이다.
2. 빛을 위한 감성의 장치 (Emotional device for light)
물리적으로 제한 된 공간 내에 고착된 빛은 다양한 감성의 장치들로 인해 새롭게 부활한다.그 빛들은 시각적 체험을 통해 또 다른 경험으로 인식되며 결국, 제한된 공간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인 동시에 감성에 기인한 우연의 장(場)을 제시한다.건축이라고 하는 보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통합 물로 걸러진 이 장치 ( Emotional device )는 그 주관적인 경험과 융해되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를 기대한다.나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자리 잡은 빛에 대한 이미지의 단편을 추적( tracing )하여 그 속에 스며 있던, 지금은 퇴색 되었을지 모를 자극( scene, 기억의 장 )들을 다시 들추어 내어 감성의 장치(Emotional device )에 담아 보려 한다.그 장치들은 나의 작업에서 가 벽과 빛의 터널 ( light of tunnel )을 통해 새롭게 재현 되고 있다. 그 장치들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의미( 물성 )는 퇴색된 자극의 존재를 은유하는 동시에 변화 하는 빛에 의해 재현된 또 다른 감성으로 완성 된다.“ the light container”에서 가 벽은 주변의 context의 대응하는 반응 체이자 빛의 반영 체로서 빛의 고임을 의도 하고 있으며. 이에 반하여 “ the shade container”의 가 벽은 물성의 변이로 인하여 빛에 의해 부유하는 것 (floating veil)으로서 빛의 발산을 의도 하였다.이 두 가지의 가 벽을 구성하는 재료는 노출 콘크리트와 알루미늄 패널이며 빛에 의한 시각을 통해 다양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빛을 받은 부분의 질감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면서 시각적으로 그 질감의 변화를 느껴지도록 한 것이며, 물성을 변화시켜 시각적 체험을 유도하는 매개체로서 역할하고 있는 것이다.“the light container 2제와3제에서는 반사 못 ( reflective pond )과 빛의 터널 ( light of tunnel ) 을 의도하였다.
글. 정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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