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잡지 공간 566호에 정연한 건축가의 건축평론이 실렸습니다.
‘틈의 영역’을 채우는 또 다른 경관
정영한(스튜디오 아키홀릭 대표)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주위 환경과 산의 흐름, 안정된 물길이 있으면서도 결코 단조롭지 않은 변화를 갖는 산수’는 좋은 집터의 첫째가는 조건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태어났더라도 양택론(陽宅論)에 의존하지 않고 주인에게 집을 무조건 지어야 한다고 권유했을 것이라 여겨질 만큼 이 주택은 풍요로운 장소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여기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경관 이전에 오랫동안 거주한 이들의 삶과 장소가 단단히 결부되어 ‘생활경관’이라는 이미지가 우선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집들의 배치나 집과 집의 사이에도 그러한 경관이 채워져 있다. 집의 구조가 새롭게 개량되거나 또는 재료가 바뀌어도 기존 생활경관과의 호흡을 길게 이어가기 위해서 건축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했는가?
우선 집의 배치를 보면, 기존 배치에서 좀 더 남향을 향해 오롯이 열리면서 발생한 ‘정면성’과 재배치로 인해 기존 마당 영역의 분할은 이미 생활경관과 빗겨나가고 있었다. 남측으로의 정면성은 노령산맥 줄기의 묵방산의 경관을 좀 더 적극적으로 담아내려는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모든 실의 방향(2층의 손님방마저)이 일관되게 남측으로만 열려 있어 각 실의 위계에 의한 조망이나 이동 동선의 시퀀스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조망과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심지어 서측 방향은 아이러니하게 대문 없이 공적 영역에 열어둔 남측과 달리 이웃과의 철저한 경계를 설정하듯 마치 ‘보이지 않는 담’으로 닫혀 있어 서측 마당은 어떤 기능도 없이 소외되어 버렸다. 오히려 동측에 배치를 좀 더 밀착시키고 서측에 주방의 보조공간인 다용도실과 보일러실을 배치해 애매모호한 영역인 ‘바람의 통로’를 좀 더 열었다면 바람길의 역할뿐 아니라 경계를 해체하고 생활경관과도 맞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북향의 서재는 바깥주인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다. 그러나 낮의 시간을 보내는 툇마루에서 거실과 식당을 통과해야 서재에 다다르거나 주방의 보조 영역에 배치되어 실상 그 기능이 떨어져 보인다. 오히려 거실의 크기를 줄여 툇마루 기능의 확장 가능성을 고려하여 거실 본연의 기능을 담고 오히려 북측 후정에 반듯하게 면했다면 나름의 사적 마당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또한 이 집에서는 전통건축과 현대건축의 영역이 충돌하고 있는데 대문 없이 현관으로 진입하기 위해 바닥을 포장한 ‘포치 데크’와 그에 면한 현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 주택에서 안주인이 주로 사용하는 공간인 창고에서 다용도실과 주방으로 진입하는 횟수가 오히려 현관 진입보다 많으며, 바깥주인도 역시 대부분 툇마루를 통해 진입하다 보니 현관이 기능적으로 필요할지는 의문이다. 또한 포치 데크는 앞마당과 서측 안주인의 공간 영역 경계에 묘하게 걸쳐 장방형의 주택에 수직 방향으로 길게 뻗어 나와 마당의 성격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현관과 포치 데크는 사는 이들을 위하기보단 손님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선형의 포치 데크에 수직으로 걸친 2개의 마당은 이미 공적인 성격이 더 강해졌고 오히려 사적인 마당은 거실과 서재에 면해 있는 북측 마당뿐이다.
한 장소에서 몇 대가 삶을 지속하는 거주의 풍경이 우리에겐 점점 더 낯설다. “건축의 1차 목적은 영역성의 창조이며, 건축가의 역할은 인간이 장소의 이미지를 체험할 수 있도록 건축적 자극을 한정시키는 것”이라 강조한 무어의 비유를 생각해 보면 기실 동일한 장소에서 개인의 역사가 시작되어 끝나게 될 삶의 순환 과정을 체득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과연 새로운 건축의 개입은 어디까지 유효할지, 그리고 그 개입을 통해 또 다른 거주성에 얼마큼 기여할지는 의문이다. 거주자의 요구에 의해 반복적으로 설정해 놓은 제한적인 생활동선을 또 다시 재현하여 낯설음을 완충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단순히 기존의 동선 체계와 생활 패턴에 의해 정의된 영역들을 나열하여 보편적 행위만을 시키는 것은 어찌 보면 가장 근본적인 건축의 개입이다. 오히려 정의되지 않은 영역들, 이를테면 이 주택에서의 툇마루나 마당이 기존 영역 간의 ‘틈의 영역’으로서 좀 더 가변적인 생활 이야기를 담는 동시에 장소의 경계를 넘어 주변 영역들과 관계 맺기를 통해 또 다른 거주성을 위한 가변의 영역으로서 ‘생활경관’을 채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영한은 한양대학교 대학원 건축과를 졸업했다. 2002년 스튜디오 아키홀릭을 개소하여 현재까지 다수의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인사동의 ‘체화의 풍경’으로 2013년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했으며 2014년에는 ‘6×6주택’으로 김수근 프리뷰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현재 장기 기획 전시 <최소의 집>의 총괄 기획을 맡아 대중과 건축의 접점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